'빨간 맛'의 원조, 혼다 타입 R 30주년 (1)
- 한명륜 기자
- 2022년 12월 9일
-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3년 11월 2일
레이싱의 쾌감을 공도로 옮긴 대중차
레이싱 머신이 갖고 있는 압도적 쾌감을 대중적 차종에 적용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른다. 개발 비용에 비해 부가가치가 낮아 수익성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다의 타입 R이 현재와 같은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현재 대중적 차종 기반 고성능차 하면 현대 N이 더 익숙하겠지만, 아직도 글로벌 시장에서는 혼다의 타입 R의 위상이 더 높다. 국내에도 타입 R을 동경해, 전용 파츠를 부착하는 튜닝 마니아들도 있고 그들은 높은 확률로 1990년대 이전에 10대에 도달했을 사람들이다.

아무튼 그 타입 R이 지난 11월 27일로 30주년을 맞았다. 1985년 혼다에 입사해 NSX 1, 2세대의 연구 개발에 참여하고 현재 혼다기연공업의 기술 홍보를 맡고 있는 츠카모토 료지(塚本亮司)와 2007년에 입사해 글로벌 출시 모델의 익스테리어 디자인을 맡고 있는 하라 다이(原 大) 두 사람이 세월을 초월한 타입 R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레이싱(Racing)의 빨간(Red) 맛, 타입 ‘R’
챔피언십 화이트라고도 불리는 아이보리 컬러에 진한 빨강의 혼다 엠블럼.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두 조합만으로도 ‘타입 R’의 상징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혼다 스피릿을 상징하는 타입 R의 시초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NSX-R이다. 인간 존중을 강조한 혼다답게 ‘인간 중심의 슈퍼 스포츠카’를 지향한 1세대 NSX의 특별버전인데, 챔피언십 화이트와 레드의 조화는 다름 아닌 1965년 멕시코에서 리치 긴터가 혼다에 첫 포뮬러 원 그랑프리 우승을 안겼을 때 탔던 RA272의 디자인에서 착안한 것이다. 일본 국기를 상징하는 디자인이기도 하지만 레이스에 대한 열정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 NSX-R의 생일이 바로 어제인 11월 27일이었다.
1세대 NSX은 등장은 1987년이다. 당시는 스즈카 서킷에서 열린 일본 그랑프리를 기해 포뮬러 원 인기가 치솟고 있을 때였다. 그 전에 서킷 주행을 즐기는 이들은 있었지만 이 포뮬러 원 붐을 통해 많은 일본이들이 스피드에 대한 동경을 갖게 되고 이를 통해 본격적으로 일본 모터스포츠가 발전을 향한 탄력을 받게 됐다.

당연히 혼다의 엔지니어들은 ‘누구라도 놀랄 만한 빠른 스포츠카를 만들고 싶다’는 불태웠고 그 이상은 좀 더 서킷 공략에 특화된 머신을 원하던 NSX-R 이전 1세대 NSX 오너들의 목소리와 만나 실현되기에 이르렀다. 바로 그 당시 NSX-R 개발에 참여했던 츠카모토 료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세대 NSX를 개발할 당시에는 보다 인간 중심의 스포츠카를 만들어야 한다는 ‘실버파’와 스피드를 포함한 운동 성능을 추구해야 한다는 ‘아카파(赤派)’가 격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 쌍방의 생각을 충분히 반영한 것이 신세대의 스포츠카인 1세대 NSX였던 거죠. 어디를 달려도 쾌적하지만 달리기 잠재력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둔 차였죠. 개발 당시 그 아카파의 의지가 NSX-R 개발의 시작으로 이어진 겁니다. 기존 NSX에서 쾌적성을 위한 부분을 한계까지 없애고, 서킷에서 극한의 퍼포먼스를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목적인 차가 바로 NSX-R 이었던 것이죠.”

그로부터 30년 후, NSX-R로부터 배양되어 면면히 이어져내려온 현재의 타입 R은 쾌적성을 희생하지 않고도 서킷에서의 퍼포먼스 발휘가 가능하도록 숙성됐다. 현재까지 등장한 타입 R 차종은 모두 12대. 그 계보를 돌아보았다.
혼다 스피릿을 상징하는 타입 R의 계보
1992년 : NSX-R

철저한 경량화와 파워트레인 튜닝으로 속도를 연마한 퓨어스포츠카
1995년 : 인테그라 R


NSX-R과 마찬가지로 경량화와 바디 강성의 향상을 추구한 모델. 전용 튜닝 포함된 엔진도 탑재돼 발군의 주행성능을 발휘했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혼다 팬을 만족시키면서도, 젊은 고객들이 살 수 있는 가격으로 실현한다는 것은 NSX-R로는 실현이 어려웠습니다. 이 당시 차종들은 타입 R을 전제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인젠 룸이나 발 주변의 레이아웃 제약 조건을 두고 작업하는 것이 중요했다고 들었습니다.”
양산 차종을 베이스로 하면서 숙련공이 수작업으로 엔진 부품을 연마하는 등 타협이 없는 튜닝이 적용된 것이 인테그라 타입 R이다. 엔진은 최고 출력 8,000rpm 에서 최고 출력 200 마력을 발휘했다. 양산차용의 자연흡기 엔진으로서 당시 차종으로서는 최고인 리터당 111마력의 출력을 실현한 차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NSX-R의 경우 당시 금액으로 900만 엔이 넘었는데, 인테그라 타입 R은 불과 220만 엔으로, 퍼포먼스 드라이빙을 즐기고자 하는 젊은 운전자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었다.
1997년 시빅 타입 R(EK9)

전설의 시작. 베이스가 되는 시빅 5세대(EK9)이 가진 발군의 자질을 기반으로 컴팩트하고 활달한 역동성, 고도의 제어성을 모두 만족시켜 인기가 높은 모델이었다. 1.6리터 엔진으로 185마력의 최고 출력을 발휘했고, 종래 전륜 구동의 상식을 뛰어넘는 경쾌한 핸들링을 자랑하는 경량 스포츠카로서 그 이름을 울려퍼지게 만들었다.
1998년 : 어코드 타입 R

어코드는 시장별로 세대와 모델이 달랐다. 어코드 타입 R은 북미와 유럽 시장 기준 6세대 모델을 기반으로 했다. 바로 전 해 시빅 타입 R로 시작된 타입 R의 인기가 높았고, 이를 어코드에도 적용해달라는 시장의 목소리가 컸다. 이에 어코드의 차체에서 60kg의 무게를 덜어내고 전용으로 튜닝된 2.2리터의 엔진을 장착했다. 최대 7,200rpm의 회전수에서 212ps의 최고 출력을 뿜어낸데다 토르센 LSD(리미티드 슬립 디퍼렌셜), 모모 스티어링 휠, 듀얼 배기 등 퍼포먼스 튜닝카의 모든 것을 갖춘 이미지였다. 다만 일본 내에는 출시되지 않아 인지도는 높지 않았다.
2001년 : 인테그라 타입 R(DC5, 위) & 시빅 타입 R(EP3, 아래)


인테그라 타입 R은4세대 모델로, 북미 시장에는 어큐라 RSX로 출시된 퍼포먼스 지향의 2인승 차량이다. 가변 타이밍 캠을 적용해 주행 상황에 따라 손실을 최소화하고 출력을 높일 수 있는 DOHC i-VTEC 2.0리터 직렬 4기통 엔진을 적용했으며 최고 출력 220ps를 발휘했다. 이 엔진이 그 유명한 k20a 시리즈 엔진이다. 변속기는 기어비가 촘촘한 6단 수동이었고 브레이크는 4피스톤 브렘보였다.
이 당시의 시빅 타입 R은7세대, 유럽형의 3도어 모델을 기반으로 했다. 엔진은 인테그라에 들어간 DOHC i-VTEC 2.0리터였으나 출력은 200ps로 약간 디튠됐다.하지만 일본 내수용은 215ps의 출력을 발휘했다. 또한 타입 R을 상징하는 컬러인 챔피언십 화이트 역시 일본 내수용의 EP3 시빅 타입 R에만 적용됐다. 퍼포먼스 면에서도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0→100km/h 기록의 경우 유럽형이 6.5초인데 비해 일본 내수용은 5.8초를 기록했다. 다만 최고 속력의 경우 일본은 227km/h인데 비해 유럽형은 235km/h였다.
2002년 : NSX-R(NA-2)

혼다는 새로운 시대에 들어와 타입 R에도 변화가 있어야 함을 느낀다. 인테그라와 시빅이 엔진 퍼포먼스를 올리는 데 비해 280마력이라는 규제 한계에 이미 도달해 있던 NSX-R의 경우, 에어로다이내믹의 강화를 통한 운동 성능을 높이는 것으로 결정됐다.
“공력에 의해 조종 안정성을 높인다는 ‘공력조안(空力操安)’이 주된 접근 방향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차체 면을 플랫하게 하거나, 전면에서 받아들인 공기를 리어 스포일러와 조화시켜 전후 리프트 밸런스를 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고속 주행 시에는 타이어의 마찰력을 높이고 한계 영역 제어 성능의 레벨업을 그린 것이죠.”
레이싱카와는 달리 안전기준에 따라 최저지상고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 난점이었으나 무빙 벨트를 이용한 풍동(Wind Tunnel) 테스트, 공력 시뮬레이터를 활용해 이러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2007년 : 시빅 타입 R(FD2)

8세대 시빅을 기반으로 한 시빅 타입 R. FF(앞 엔진 전륜 구동) 레이아웃 최고 속도 싸움을 일으킨 모델이다. 속도와 하나가 된다는 고차원적인 드라이빙 쾌감을 획득한다는 목적으로 개발됐다. K20A 엔진의 출력을 225마력까지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2009년 시빅 타입 R 유로(FN2)

유럽 지역에 시판된 3번째의 시빅 타입 R. 좀 더 독창적인 스타일과 날카로운 헤드램프가 인상적인 3도어 모델이다. 일본 내에서의 수요가 높아 2009년 3,510대 한정으로 역수입됐다. 한국에도 마니아들을 통해 드물게 들어왔던 모델.
2015년 : 시빅 타입 R(FK2)

여기서부터는 비교적 눈에 익은 모델이다. 2.0리터 터보 엔진을 기반으로, 전륜 구동에서 가능할까 싶은 310ps의 최고 출력을 낸 K20C 엔진이 적용됐다. 6단 수동변속기를 탑재했으며, 뉘르부르크링 노르트슐라이페 랩타임을 7분 50초 63에 끊어냈다. 그리고 르노 메간 RS와의 엎치락뒤치락하는 싸움이 본격화됐다. TCR 레이스에서 커스터머 레이싱카로도 인기가 높다.
2017년 : 시빅 타입 R(FK8)

FK2 등장 2년 후에 출시됐다. 기본 엔진 성능은 FK2와 동일하나, 절묘한 핸들링 제어를 통해 FF 타입 뉘르부르크링 랩타임 기록을 경신했다.종전 FK2 대비6초 가까이 단축한 7분 43초 80으로, 최고 출력이 70ps나 높은 후륜 BMW M2보다도 빠른 기록이다. 3가지의 드라이빙 모드를 설정에 트랙부터 일상 주행까지 모두 가능하도록 했다는 것도 이 차의 장점이다.
2022년 : 시빅 타입 R(FL5)

타입 R 등장 이후 30주년을 장식하는 시빅 타입 R. 11세대 시빅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여전히 시빅은 세계 시장에서 견고한 존재다. 엔진은 K20C를 다듬은 K20C1으로 일본 기준 최고 출력 330ps, 유럽 기준 320ps를 발휘한다. ‘Honda LogR’이라는 자체 데이터로거가 내장돼 있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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