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포드 넥스트 제너레이션 레인저 와일드트랙
특별히 아웃도어 라이프를 즐기는 사람도 아니고, 옮길 물건이 많은 사업자도 아니다. 그런 사람에게 픽업트럭이 주어지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세대교체로 찾아온 포드의 레인저 픽업트럭 와일드 트랙이, 다소 심심한 40대 남자의 삶에 들어온다는 상상을 해봤다.
좌핸들로 다시 만난 P703, 이렇게 편했나?
개인적으로는 2022년 태국에서 이 차를 먼저 타봤다. 당시는 우기였다. 조금만 공도를 벗어나면 한국과는 차원이 다른 오프로드를 만날 수 있었다. 비는 순간순간 시야를 지웠고 진흙 입자는 훨씬 곱고 미끈거렸다. 웅덩이는 곳곳에 있었고, 굵은 바윗덩이들이 앞에 깔려 있었다. 발전 중인 국가다 보니 아스팔트의 포장 상태는 좋았지만 의외로 지형히 험한 곳이 많았고, 비바람에 쓰러진 나무도 흔했다.
하지만 그런 건 전혀 어려움이 아니었다. 레인저의 터레인 모드는 어떤 조건에서도 컨트롤이 쉬워서 오프로드 주행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도 쉽게 진탕이며 웅덩이를 벗어날 수 있게 해줬다. 순정 상태에서도 코만 내놓은 채 하마처럼 웅덩이를 헤치고 나가는 능력은 비슷한 체급의 국산 오프로더에서 맛볼 수 없는 것이었다. 4륜 구동 조작 외에 오프로드의 각 모드는 12인치 스크린 안에 통합돼 있다. 오프로드 주행 경험이 부족하더라도, 안내 가이드를 따라 조작하면 된다.
정작 더 어려웠던 것은 오른쪽에 있는 운전석이었다. 당연한 게, 이 차는 호주 법인에서 개발돼, 태국, 남아공 등의 시장에 주로 판매되는 차다. 쉽게 생각하면 북미 외 영연방 국가 지향 차종인 것이다.
같은 좌측통행 국가라도 일본에서의 운전 경험은 큰 도움이 안 됐다. 일본에서 운전했던 차는 기껏해야 닛산 마치 아니면 혼다 N 박스 정도여서 왼쪽이나 오른쪽이나 차 주변 공간감각에 차이가 없었지만, 레인저는 아니었다. 조수석 쪽의 감각은 완전히 초보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게다가 일본은, 투수들의 구속과는 달리 도로를 달리는 차들은 죄다 서행이어서 특별히 쫓기는 느낌도 없는데 비해, 태국은 아니었다. 앞 일행과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 속도를 내려다가도 갓길에 사람이 보이면 일찌감치 브레이크를 밟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우측통행 사양으로 맞춰진 레인저를 다시 타 보니 일반적으로 타던 SUV와 다를 바가 없었다. 실제 휠베이스는 3,270㎜, 전폭은 1,885㎜로 렉스턴 스포츠보다 약간 큰 수준. 오히려 전장은 5,400㎜가 넘는 칸보다 살짝 짧다. 픽업트럭 하면 커서 운전하기 불편하다는 말은 이 차에 통하지 않는다.
게다가 세대교체를 거치면서 차량 전체가 좀 더 미끈해졌다. C 클램프 디자인을 채용한 헤드램프 디자인은 대담함을 강조하지만 측면에서 봤을 때는 A 필러 각도가 2021년 국내 출시됐던 전 세대 레인저 대비 좀 더 완만하다. 그러다 보니 시야도 넓다. 아무래도 전장이 긴 차다 보니 측면과 후면 사각지대도 신경을 쓰며 운전했는데, 블라인드 스팟 모니터링 기능이 있기도 하고 센터페시아의 12인치 스크린이 제공하는 화면 화질도 우수해 측후면 방어운전에 대한 부담은 덜했다.
내유외유, 고급 트림 와일드트랙
이 차의 가장 큰 매력이라면 기본적으로 부드럽다는 것이다. 승차감뿐만 아니라 운전자와 차량이 만나는 모든 부분들이 부드럽게 설계돼 있다. 시트는 물론 도어 트림에 들어가는 폼 소재가 훨씬 부드러워졌다.
쇼크 업소버의 반응도 상당히 부드럽다. 이전에는 과속방지턱이나 요철을 만나는 순간 ‘쿡’하고 치받는 느낌이 있었다면 이번은 첫 충격에 대해 상당히 여유롭게 반응한다. 그래서 주행 중 좌석으로 올라오는 충격이 적다. 평일의 고속도로에서, ADAS 시스템의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과 좌우 차로 인식 및 조향 보조 기능을 사용하면 상당히 여유롭고 편안한 고속 주행을 누릴 수 있다. 정지 및 재출발이 가능하며 저속에서도 작동이 가능하다. 10단 자동변속기가 적용돼 있는데 저속 크루즈 컨트롤 시 변속 충격이 최소화됐다.
픽업트럭이다보 보니 아무래도 고속 주행 시 전면 주행풍에 의한 소음은 존재한다. 하지만 의외로 측면 강풍에 의한 소음은 적은 편. 특히 날을 잘못 받아서인지, 시승차를 받은 날 중 두 번째 날이 기록적인 강풍이 있던 날이었다. 바로 그날 강릉에 있었다. 그곳을 떠나자마자 약 1시간 뒤에 산불도 일어나고 말았다. 서울-양양 고속도로를 타기 위해 양양으로 향하던 중 그 악명 높은 양간지풍이 차량의 측면을 때릴 때도, 차량 안은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사실 와일드트랙은 랩터 중에서도 편의 사양 면에서는 최상위 모델이다. 호주, 태국, 남아공 및 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최고 출력 130ps, 6단 자동 및 5단 수동변속기 사양, 쉽게 말하면 포터 사양이 더 많이 팔린다. 그 시장에서 와일드트랙은 오히려 별종으로 여겨지는데, 그게 한국에서는 통할 만한 급이 되는 것이다.
2.0리터 바이터보 디젤 엔진은 최대 토크가 51kg∙m에 달함에도 정숙성이 우수하다. 특별히 방음, 방진 소재가 추가된 것은 아니지만 새로이 적용된 섀시에서 엔진 마운트, 파워트레인 연결부에서의 마감 등이 만들어내는 주행 감각이라 할 수 있다.
실연비 좋고 주차도 편하다
이 차의 복합 연비는 10.1km/L. 고속 주행 연비는 11.7km/L로, 비슷한 체급의 KG 모빌리티의 렉스턴 스포츠와 비슷하다. 하지만 실연비가 좋다. 왕복 500km 이상의 고속도로 주행에서는 연비가 13km/L를 넘어갔다. 공차 중량이 2.4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우수한 편. 와일드트랙은 휠 직경도 18인치로 상대적으로 고속 장거리 온로드 주행에 유리한 점이 많다.
다만 강한 가속 시 변속기 반응은 약간 늦다. 이전 세대 대비 크게 개선된 부분은 아니나, 고하중 차량인만큼 내구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세팅으로 보인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연비는 더욱 주목할 만하다.
연비가 좋아 주유를 자주 할 일은 없지만 캡리스 주유구를 선택한 것도 잘 한 일. 주유구 캡이 주유구 근처에 자잘한 상처를 낸다. 다만 주유기 노즐을 뽑을 때는 주유가 끝나고 나서 약 4, 5초 기다린 후에 뽑으면 좋다. 내부 압력 때문에 기름이 밖으로 살짝 넘쳐흐를 수도 있다.
최고 출력은 기존 213ps에서 205ps로 약간 하향 조정됐다. 비단 이 차뿐만 아니라 치근 주요 차량들의 최고 출력은, 동일 세대, 동일한 엔진이라도 약간씩 하향 조정되는 추세다. 아무래도 환경 규제에 대응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인다. 대신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기존 195g/km에서 193g/km로 하향했다.
최근 국내 시장에도 피업 트럭이 몇 종 출시됐지만, 여전히 픽업트럭은 아직 한국의 일상 환경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보편적인 인식이다. 하지만 레인저 와일드트랙은 의외로 아파트 주차칸에서 약간의 여유가 있다. 도어가 열리는 동작도 부드러워 타고 내릴 때 측면 차량을 찍을 위험도 덜하다. 특히 2017년 주차장 구획에 관한 법규 개정으로, 그 이후에 지어진 건축물의 주차면의 최소 폭은 2.5미터 수준이다 아주 여유롭진 않지만 주차했을 때 특별히 2개 차선을 침범한다든지 할 일은 없다.
조향이 날카롭진 않다. 특히 저속 구간에서 스티어링휠 조작에 대한 반응이 조금 늦다. 물론 주행 중 코너에서의 선회는 부드럽고 견고하지만 주차장처럼 시속 10~15km 정도 구간에서는 기존 다른 차량을 타면서 주행했던 것 대비 스티어링휠을 반의 반 바퀴 정도 더 돌려야 하고, 돌리는 속도도 빨라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차량 적재함 양쪽에 카고 공간으로 바로 올라갈 수 있는 발받침대도 있다. 아무리 견고해도 테일게이트의 경첩은 소모품이다. 이를 반복해 열고 닫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장점이다. 이전 세대 와일드 트럭의 경우에도 여기에 할리 데이비슨의 오버리터급 모델 팬아메리카를 넉넉하게 적재해본 경험도 있다. 픽업트럭을 굳이 사업용이나 캠핑용으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골프 등 ‘장비빨’ 취미 활동에도 최적이다.
사업용, 화물 등록이 살 길?
2021년에 출시된 전 세대 레인저 와일드트랙의 경우 국내 출시 가격이 4,990만 원이었다. 현재 가격은 6,350만 원. 가격 상승 폭은 27%다. 세대 교체, 기능 향상 등의 긍정적인 내용과, 원자재 가격 상승 등의 요인을 고려하더라도 소비자들이 이를 비싸게 받아들이는 것은 현실이다.
그럼에도 이 차를 출고하는 고객들은 존재한다. 디젤 엔진에 대한 규제가 갈수록 격해지는데, 6,000만 원이 넘는 돈을 디젤 엔진 차량에 쏟아붓느냐는 의견도 있다.
사실 이 차가 노리는 시장은 그야말로 틈새 시장이다. 취미로 아웃도어 활동을 즐기는 사람이라기보다 아웃도어 활동 자체가 업무인 업계 종사자, 적재할 화물이 많긴 하지만 이동 시 편리성 등도 포기할 수 없고, 또 투자 여력도 있는 사람들이 목적이다. 물론 그런 이들이라고 해서 가격 상승에 대한 거부감이 없진 않겠지만 그래도 구입하는 경우는 사업용으로서 메리트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화물용으로 등록하면 부가세도 환급되고 환경 규제 조치의 영향도 덜 받을 수 있다. 자동차 검사 주기가 1년으로 짧다는 게 단점이었지만, 정부가 적재량 1톤 이하 화물차의 최초 검사 시기를 2년으로 연장했다. 차량의 내구성에 비해 검사 주기가 너무 짧아 생계형 소형 화물차 차주들의 경제적 손해(일당, 시간)가 크다는 판단에서다.
사실 레인저 와일드 트랙의 경우 경쟁 포지션의 차량이 애매한데 오히려 이게 장점일 수 있다. 국산 픽업트럭들은 가격이 훨씬 싸고 크기도 비슷하지만 연비, 순정 상태에서의 오프로드 주행 및 도강 능력 등에서 약점을 노출한다. 게다가 국산 픽업트럭을 실제로 오래 보유했던 오너들은 특유의 도색과 마감 불량으로 인한 녹, 체결부 느슨해짐 등의 자잘한 고장을 빨리 겪는 편이다. 물론 레인저가 그런 점을 압도할 정도의 마감 품질을 자랑하는 차는 아니겠지만, 약간이라도 금전적 여유가 있다면 충분히 눈에 들어올 만한 선택지다.
물론 최근 GMC가 6.2리터 가솔린 엔진의 시에라를 1억이 안 되는 가격에 들여 왔지만, 배기량과 연비라는 것이, 실제 유지해 보면 쉽게 접근하지 못할 벽이다. 즉 레인저 와일드트랙은 국산 디젤 픽업트럭과 본격 가솔린 대배기량 픽업트럭 사이에 난 좁은 문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 좁은 문이 최적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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