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페리엔자 페라리 미디어 드라이브 in 강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페라리는 영원한 ‘남의 차’일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남의 차이기에, 페라리는 우리 모두의 페라리일 수 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에밀리아 로마냐의 페라리 박물관을 찾는다. 그들이 모두 페라리를 살 수 있어서 그러겠는가? 지난 70여년간, 시대 변화를 타고 넘으며 페라리는, 자신이 달리는 거리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그 페라리를 타는 이들의 삶에는 어떤 아름다움이 담겨 있을까? 특별한 페라리를 경험하는 프로그램, 에스페리엔자 페라리(Esperienza Ferrari)의 한국 행사에서 이를 조금이나마 맛볼 기회가 있었다.
도전과 조화
페라리 GT의 가치, 페라리 로마 스파이더
1960년대 지오반니 아녤리(1921~2003, 존 엘칸 회장의 외조부)는 매일 아침, 피아트를 직접 몰고 출근했다. 이 차의 심장은 페라리의 것이었다. 그의 운전은 거칠었다. 사람들은 그를 만류했지만, 그는 이렇게 받아쳤다. “이봐,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보다 나쁘게 죽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당시의 이탈리아는 정말 그랬다. 극한 대립의 정치 상황 때문에 테러와 납치가 흔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당시의 로마는 또한 문화의 전성기였다. 194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이탈리아 영화는 그야말로 황금기였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아름다운 인생>(1960),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정사>(1960) 등이 이 시기 작품이다. 또한 감독과 주연 배우는 프랑스인-특히 알랭 들롱-들이지만 1950년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태양은 가득히>(1960)도 이 시기의 작품이다.
혼란기일수록 부자들에게는 기회가 많다. 전후 10여년 간 재건기에, 옛 귀족이나 사업가들은 오히려 몸집을 키웠다. 1969년 등장한 페라리 365 GTS 4는 노즈가 긴 프론트 엔진 컨버터블의 유려한 비례를 통해, 페라리를 사랑했던 이들의 미의식을 전한다. 레이스에 매진하던 페라리는 귀족들의 그랜드 투어 문화와 연결시킨 365 GTS 4를 내놓는다. 4,390cc, 뱅크각 60°의 V12 엔진은 당시로서는 놀라운 320ps의 최고 출력으로 245km/h의 최고 속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전후륜 더블 위시본 타입의 서스펜션에 텔레스코픽 쇼크 업소버를 장착해 부드러운 승차감을 발휘했다.
탑을 열고 자유롭게 달리던 그 당시 귀족의 후예들과 부자들은, 도전적이면서도 조화로운 삶을 찾는 것이 일생의 과제였을 것이다. 그런 차의 가치를 54년만에 부활시킨 차가 바로 로마 스파이더다.
3.9리터(3,855cc) V8 터보 엔진의 최대 토크는 66.3kg∙m 정도로 배기량에 비해 크지는 않다. 대신 양쪽 터보차저 모두 트윈스크롤 방식(엔진회전수별 배기 유속에 따라, 배기가스 통로 면적을 나누어 터빈 가동률을 높이는 방식)이다. 즉 트윈터보이지만 저속에서도 운전자가 부드럽고 품위 있는 주행을 즐길 수 있게 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 하지만 8단 DCT에다 1,900rpm에서 최대 토크의 80%를 쏟아낼 수 있는 역량도 갖춰, 언제든지 튀어나갈 준비도 갖춘 상태다. 다만 부자들은 쓸데없는 일이나 상황에 흥분하고 경쟁하지 않는다. 도전과 평정심의 조화, 그것이 로마의 파워트레인이다.
620ps(7,500rpm)의 최고 출력은 일반적인 운전자로서 근처에도 가지 못할 영역이다. 그러나 200km/h대의 속력에서도 불안하지 않다. 횡성대교, 평창 인근의 거친 봄바람도 순순히 길을 비켜 준다. 특허 기술인 윈드 디플렉터 덕분에 아무리 빠른 속력에서도 차량 뒷좌석의 물건들이 소용돌이에 휩쓸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윈드 디플렉터의 주행 중 전개는 최대 170km/h까지 가능하다.
기쁨의 공유
아름다운 외관과 사운드
프런트 미드 엔진 컨버터블은 여러 가지 매력 포인트가 있다. 일단 언제든지 트랙으로 뛰어들 준비가 된 미드쉽 스포츠카와는 달리 여유로운 비례감을 자랑한다. 3.9리터 V8 트윈터보 엔진이 적용된 페라리 로마 스파이더는 클래식한 볼륨감이 넘치는 전면부 모습을 자랑한다. 최근 페라리의 하이테크 트렌드와는 살짝 다른 결이다.
쿠페를 베이스로 하는 컨버터블은, 대부분 제조사에서 디자인적으로 어려운 과제다. 쿠페의 아름다운 선을, 탑 개폐와 관련된 부품, 공력 파츠 유닛이 제대로 살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 스파이더는 다르다. 후미의 탑 수납부에서 트렁크 리드로 가는 선은 쿠페와 다름없이 매끈하고 유연하다. 탑을 열었을 떄, 운전자가 노출되는 범위는 딱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은 즐기고 지나친 호기심은 걸러낼 수 있을 정도다. 국내 슈퍼카 시장이 급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페라리는 시선을 모으기에 충분하다. 대부분 그 시선은 질시라기보다 아름답고 멋진 것을 거리에서 시각적으로 공유하는 즐거움에 가깝다. 내가 보행자의 입장으로, 서울 강남 도산대로에서 페라리들을 목격할 때 받는 느낌도 그와 다르지 않다.
컨버터블 엔지니어링에서 또 다른 중요한 목표는 운전자가 느낄 청각적 만족도다. 주행 중 엔진의 구동음과 배기음이 주행풍과 얼마나 적절히 섞이면서 최적의 청각적 효과를 만들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이 영역에서 로마는 넘을 수 없는 벽이다. 페라리 자체가 그렇다. 다른 브랜드의 엔지니어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3.9리터 V8 트윈터보 엔진은 생각 이상으로 미성(美聲)을 자랑한다. 낮은 엔진회전수에서 경박하게 붕붕거리지도 않고 독일 토크 머신처럼 지나치게 걸걸한 느낌도 없다. 그렇다고 높은 엔진회전수에서 지나치게 찢어지거나 쏘아붙이는 느낌도 아니다. 풍부하면서도 밝은, 테너로 치면 스핀토나 리리코 정도의 음색이다.
발견의 즐거움
창조적 감식안
페라리 오너들은 특별하다. 물론 페라리만큼 비싼 차들은 많다. 그러나 돈만 있다고 해서 누구나 페라리의 오너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페라리 오너들이 특별한 점은 바로 시간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시간을 갈아 넣어 어느 정도의 부를 얻는 사람들은, 프리미엄 브랜드 차종까지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식적인 절차로 페라리 오너가 될 수 있는 정도의 사람들은, 시간과 시스템을 이용해 부가 가치를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다. 금수저라면 그걸 유지하는 것도 능력이다.
우리 사회에서 감식안의 가치는 창작력에 비해 다소 소홀하게 평가된다. 하지만 페라리를 존재하게 한 유럽의 예술 감각은 감식안을 중시한다. 그 감식안을 가진 패트런(후원자)들이 창작자들을 독려했다. 그건 페라리의 발전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감식안은 훈련 그리고 충분한 자금력에 의해 후천적으로 길러지기도 한다. 그래서 높은 확률로 페라리 구매자들은 미술에 관심이 높다.
스위스 출신으로 회화, 조각, 설치, 비디오 등 다양한 매체를 아울러 작업해 온 아티스트 우고 론디노네(1964~)의 <Burn to Shine> 시리즈를 관람했다. 아프리카 마그레브 지역의 전통 의식을 정교한 현대 무용으로 표현한 비디오 퍼포먼스 ‘Burn to Shine’은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촬영된 것이다. 카메라가 불 가까이 다가갔다가 불을 통과해 춤추는 사람들 쪽으로 이동하는 화면, 그리고 점점 커지는 타악기 소리는, 먼 곳을 헤매던 사람이 제의의 현장을 발견하고 다가가는 발견과 관찰의 시선이었다.
자동차의 퍼포먼스도 결국 불과 함께 추는 춤에 다름아닐지도 모른다. 그 원시적인 힘을 정교하게 다듬은 것이 페라리의 엔진이다.
인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우고 론디노네의 작품 중엔 11점의 말 조형물이 있다. 투명한 몸체에 시시각각 변하는 세계 각 바다의 색을 담았다. 성형 시 색소를 첨가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 주위로 그 바다의 풍경들을 단순화한 그림 12점이 걸려 있다. 우고 론디노네가 이 작품들을 구상하고 제작한 때와 장소는 팬데믹 시기 뉴욕 롱아일랜드에서였다. 그는 시간 속에 자신의 일기를 썼다고 전했다.
페라리는 팬데믹 기간 가장 혹독한 고통을 겪었던 제조사 중 하나다. 특히 이탈리아 북부는 유럽 전역에서 가장 피해가 컸다. 공교롭게도 14~15세기 유럽의 페스트도 이탈리아 시칠리아에 당도한 상선으로부터 시작됐다. 페라리 로마를 비롯해 296, SF90 스트라달레, 푸로산게 등은 그 시기의 인고 속에서 만들어진 차들이다.
밀도 있는 휴식
페라리 오너들에게 중요한 또 한 가지 가치는 휴식이다. 그것도 밀도 있는 휴식. 로마 스파이더를 몰고 도착한 곳은 정선의 파크로쉬 리조트 앤 웰니스였다. 주요 자동차 브랜드 행사가 많이 펼쳐지는 곳이다. 주변 도로 자체가 와인딩을 즐기기 좋고 동해안으로의 접근성도 좋다. 주위에 민가도 드물어 자동차를 주행할 때 행인들을 위험하게 할 확률도 낮다.
에스페리엔자 페라리는, 페라리의 세계 각 권역 법인이 소수 미디어를 대상으로 진행하는 시승 행사다. ‘esperienza’는 이탈리아어로 경험(experience)을 의미한다. 시승 후 페라리에 대해 나누는 대화는 밀도 있었다. 사람들에 따라서는 무용한 모습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잠시나마 엿본 페라리 오너의 삶에는 무용한 것이 없었고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했다. 무용하다는 것은 그 쓸모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드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페라리의 오너들은 범인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의 가치를 발견하고 거기서 부를 빚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에게는 휴식조차 특별한 재창조의 동력이다.
이 행사에는 로마 스파이더와 296 GTS가 함께 했다. 296 GTS의 시승기도 곧 업로드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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