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해운사 우회 비용 손실, 국적∙브랜드 따라 셈법 달라
말 그대로다. 지중해, 인도양, 태평양을 잇는 세계 무역의 동맥인 호르무즈 해협에서 이란 해군이 미국 국적 유조선 세인트 니콜라스 호를 나포하면서 세계 주요 해운사들이 이 항로를 기피하고 있다.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는 주요 글로벌 기업들은 부품 수급에서 차질을 피할 수 없다. 팬데믹 기간 내내 기업들을 괴롭혔던 공급 문제가 조금 풀리려나 싶더니 이번엔 전쟁이 발목을 잡는다. 다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영향이 큰 제조사와 그렇지 않은 제조사들의 셈법은 달라진다.
또다시 불거진 자동차 부품 공급 리스크
10일 더 걸리고 3,300해상마일 길어져
덴마크 국적의 세계적 해운사 머스크(Maersk), 하파그 로이드(Hapag-Lloyd) 등 주요 해운사들은 이번 나포가 있은 후 항로를 조정한다고 밝혔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희망봉(Cape of Good Hope)를 우회하는 항로가 그 대안이다. 네덜란드 로테르담 항에서 싱가포르까지기존 수에즈 운하-호르무즈 해협-인도양 항로를 이용할 경우 8,500 해상마일(1만 5,742km)이며 26일이 걸린다. 그런데 이 항로는 1만 1,800해상마일(2만 1,850km)로 36일의 항해 기간을 요구한다. 거리는 3,300 해상마일(6,111km), 기간은 10일이 늘어나는 셈이다. 당연히 운송 비용도 증가한다. 20세기 열강들이 괜히 운하에 매달린 게 아니었다.
또한 이미 홍해 지역의 물동량 자체도 크게 위축돼 있다. 로이터통신의 자료에 따르면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2023년 12월 내 1일 기대 물동량은 약 6만 TEU(20피트 컨테이너 단위)이나 전쟁 이후 20만 TEU로 급격히 줄어들어 있다.
이는 자동차 업계에 직접적인 위기 즉 부품 공급의 리스크로 작용한다. 이로 인해 독일 베를린 인근 브란덴부르그의 테슬라 기가팩토리는 2주간 생산을 중단한다. 테슬라는 원래 독일 기가팩토리의 규모를 대폭 확장할 예정이었는데, 계획에 차질이 있을 수밖에 없게 됐다. 벨기에 겐트의 볼보 공장도 차주 중 생산을 중단하나 불행 중 다행히 3일 정도로 그칠 예정. 자동차 외에도 이케아 등 주요 제조업 기업들의 생산 차질과 배송 중단 사태가 이어질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또한 석유 수송에도 필연적으로 약영향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는 석유 의존도 높은 자동차 시장, 대표적으로 한국과 같은 경우 자동차 판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악재가 된다. 다행히 아직 한국의 소비자 유가는 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지만 불안 요소는 크다. 팬데믹 이후 살아나나 했던 세계 자동차 업계는 다시금 시름에 휩싸이게 됐다.
이'伊'제이?
이란 내부 문제와 미국 대선에 답 있을 수도
그런데 이번 유조선 나포 사건의 디테일을 보면 어딘가 이상하다. 유조선의 국적이 미국이고, 이란 해군의 이 선박 나포 명분이 ‘이란으로부터 훔친 석유를 되찾는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애초 이 유조선의 행선지는 튀르키예였다. 튀르키예와 이란이 세속주의와 근본주의로 종교관에 차이가 있고, 터키가 친미 성향 국가라지만 어찌 됐든 두 국가는 이슬람 세계에 속해 있다. 튀르키예는 미국이 막아도 이란과 독자적으로 무역을 하겠다는 의사를 강하게 밝혔을 정도다. 이란이 굳이 이런 선택을 했어야 하는 이유가 궁금해진다.
힌트는 이란의 내부 정세에 있을 수 있다. 이번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에서, 이란은 이스라엘에 대해 위협적인 목소리를 내긴 했지만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개입에 가능성 언급은 자제해 왔다. 이는 2021년부터 지속된 반정부 시위를 비롯한 정정 불안에 기인한다.
현재 이란 경제는 최악의 상황이다. 여기에 내부적으로 변화를 바라는 젊은이들과 여성들의 저항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형 집행과 무력으로만 찍어누르는 데도 한계가 있다. 전쟁을 통해 내부 불만을 외부로 돌리는 전략이 통할 상황도 아니다.
현재 이란 권력자들에 대한 불만이 큰 젊은이들은 튀르키예를 포함한 아니라 레바논, 바레인 등 세속주의 이슬람 국가들에 대한 부러움이 크다. 이란은 이번 선박 나포를 통해 튀르키예 등 세속주의 국가를 추종하는 반정부 세력에 대해 일종의 경고라 볼 수 있다.
또한 당선 확률이 높게 점쳐지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미국 대선 도전과도 연관성을 부인할 수 없다. 트럼프는 재직 시 이란에 대해 시종일관 강경한 메시지를 냈고 가셈 솔레이마니 전 혁명수비대 지휘관을 제거하는 등의 극단적인 행보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밑으로는 이란에게 핵 포기를 위한 협상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어쩌면 이란은 현 행정부든 차기 행정부든미국과의 대화 채널을 복원하기 위해 일종의 신호를 보낸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이 유조선은 다른 이름으로 이란에 불법적으로 원유를 수송했다는 이유로 미 법무부에 억류되기도 했는데, 이란 해군이 미국에 대해 고강도로 도발할 생각이었다면 굳이 이런 이력이 있는 유조선을 선택했을 이유도 없다. 즉 미국 행정부가 이란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따라 상황이 급변할 수도 있다.
여기에는 현 바이든 행정부에 대한 이란의 답답함과 조급증이 원인이 됐다고 볼 수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출범 초기 이란에 호의적이었지만, 2022년 반정부 시위에 대한 이란 정부의 잔인한 탄압 이후 이란 핵합의(JCPOA, 포괄적 공동행동복원)에 대한 사실상 사망 선고를 내리고 강력한 경제 제재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2023년에는 수감자 교환 등을 계기로 이란 중앙은행 동결 자금에 대해 유화적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더니 다시 2023년 10월에 하마스와 이란 알제리 등을 기반으로 하는 개인과 단체를 테러 연계 혐의로 제재 명단에 올렸다. 즉 이란 입장에서는 트럼프보다도 바이든이 더 치떨리는 상대일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이번 유조선 나포를 통해 미국의 시선을 약하게 붙잡아두고 다음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이런 식으로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중간 강도의 통제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
※ 이란의 한자 표기 '伊蘭' 응용
미국 자동차 제조사, 피해 적어
상황 관망할 듯
그런데 지금 이런 상황이, 세계 경제의 키를 쥔 미국으로선 나쁠 게 없다. 겉으로야 영국과 함께 이 지역에 구축함을 급파하는 등 강경한 모습을 보이지만 실상 행동에선 절박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예맨의 후티 반군에 대해 영국이 폭격을 가하고, 후티 반군이 보복을 다짐했지만 ㅎ티는 지하디스트가 아닌 정규군을 지향한다. 영국의 공습에 대해 테러로 대응한다든지 할 가능성은 낮은 것. 미국으로선 대응해야 할 상황이 선명하다.
게다가 호르무즈 해협에서의 위기 때문에 부품 공급 경로가 길어져 손해를 보는 기업은 아시아와 유럽을 이으며 움직여야 하는 몇몇 제조사다. 지리 그룹이 대표적이다. 테슬라도 피해가 크긴 하지만, 주력 시장인 미국은 건재하다.
스텔란티스의 경우는 거의 영향이 없다. 푸조 등 구 PSA 그룹의 유럽 공급망은 지중해를 이용하고, 지프 등 구 FCA 그룹의 경우 북미에 그 체인이 있다. 게다가 스텔란티스의 공급 체인은 항공을 중심으로 한다.
물론 지금의 상황은 자동차 산업을 포함해 세계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만하다. 게다가 중동 문제는 한국의 경제와 직결돼 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의외로 빠져나갈 구멍이 많은 상황일 수도 있다. 자동차와 무역 관련 투자자라면 상황을 냉정히 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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