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 비용 1/10, WRC의 10배 감당 어려운 수준 아냐
공식적인 차원에서는 이루어질 가능성이 극히 낮지만, 현대의 포뮬러 원 진출설에 군불을 때는 모터스포츠 애호가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특히 2020년대 들어 급격하게 성장한 현대차그룹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과 기술 가치, 브랜드 위상을 고려한다면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 포뮬러 원에 현대가 들어가지 않는 것은 합리적인 판단이다. 현대의 위상이 오른 것은 맞지만 포뮬러 원에 참가하는 제조사들은 럭셔리 고성능 스포츠카 브랜드다. 현대가 무리한 비용을 투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자동차 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힌 정의선 회장이 전동화를 통해 선두로 치고 나간다는 메시지와 다르게 모터스포츠 영역에서도 내연기관 중심 포트폴리오에 머무르는 건 분명 아쉬운 면이 있다.
유럽 시장서 현대 브랜드 가치 올려준 WRC, 아직 놓을 수 없다?
현대는 2012년 모터스포츠 디비전인 현대 모터스포츠를 별도로 독립시켰다. 독일에 본사를 둔 현대 모터스포츠는 i30N을 기반으로, 현재 N 브랜드가 자리잡는 데 기여했다. 특히 랠리를 통해 축적한 주당 수 테라바이트의 데이터는 고성능차 개발에 있어 큰 자료가 됐다.
현대모터스포츠의 주 영역은 랠리다. 랠리는 B 세그먼트 차종을 중심으로 한다. 랠리는 유럽 시장에 잘 팔리는 차종에 대한 직접적인 테스트의 장이자 브랜드 홍보의 무대이기도 하다. 물론 미국에서도 랠리는 진행되지만 유럽에서만큼 열기가 뜨겁진 않다. 현대는 WRC에서 최근 수 년간 우수한 성과를 거둬왔다. 2022년은 시즌 우승을 토요타 가주 레이싱에게 내주긴 했으나 최종전인 일본 랠리에서 원-투 피니쉬를 기록했다.
현대모터스포츠의 시릴 아비테불 책임자의 답변은 원론적이다. 그는 1월 20일, 주요 모터스포츠 매체 기자들과 가진 인터뷰에서 “제조사의 비즈니스 니즈와 맞는 일에 집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모터스포츠가 자동차의 가치를 업그레이드하는 데 기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포뮬러 원 수준의 모터스포츠와 현대의 주력 차종들은 큰 관계가 없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아비테불 책임자는 WRC를 포함한 랠리, 그리고 비슷한 세그먼트 기반의 TCR에 주력할 것임을 밝혔는데, 이는 현대의 ‘비즈니스적 니즈’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준다.
전동화를 통한 리더쉽 쟁취, 그런데 포뮬러 E는?
2020년이 되기 전 몇 년간, 현대자동차그룹의 패스트 팔로워로서의 행보는 성공적인 결실을 맺었다. 3.3리터 트윈터보 엔진 기반의 후륜 구동 퍼포먼스 세단을 성공리에 런칭해 유럽 브랜드들의 주력 영역에 도전했다. 판매량이 대단치는 않았지만 이는 기아의 브랜드 가치 상승, 제네시스 브랜드 도약의 밑바탕이 됐다. 한계를 인정한 가운데 할 수 있는 최선을 했다는 것이 이 후륜구동 퍼포먼스 세단들에 대한 외신들의 평가였다.
그러나 급격한 전동화 붐은 내연기관 기술을 통해 선두를 점했던 독일 브랜드들의 산업계 리더쉽을 약화시켰다. 공격적으로 전동화 차종 라인업 확대에 나선 현대에게는 기회였다. 고전압 충전 시스템과 파워 유닛의 효율화를 통해, 충전 시간은 짧고 1회 충전 시 주행 거리는 길며 퍼포먼스는 막강한 차를 만들어냈다. 한국의 배터리 제조 역량 그리고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의 플랫폼화 등은 내연기관 시대 그토록 쫓아가기 바쁘던 독일 브랜드들과의 격차를 줄였음은 물론 역전의 원동력이 됐다.
2022년 미국 <모터트렌드> 매거진은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정의선 회장을 글로벌 자동차 산업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선정했는데, 이에 대해 정의선 회장은 “세계와 산업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에 대한 통찰과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열정을 가지고 전기차와 미래 모빌리티 분야에서 리더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비록 미국의 인플레이션방지법(IRA) 이후 미국 브랜드 전기차들에 밀려 다소 주춤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현대차와 기아의 전기차에 대한 시장의 호평은 이어지고 있다. 기아의 EV6는 2023 북미 올해의 차에 꼽히기도 했다.
현대차는 배터리 시스템의 효율화에 있어 뛰어난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현대차의 살 길은 전기차를 포함한 전동화 모빌리티다. 그런데 현대차의 모터스포츠 주 영역이 아직 WRC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패스트팔로워의 시대를 끝내고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되겠다’는 정의선 회장의 일성에도 맞지 않는다.
내부적으로 이미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포뮬러-E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내연기관 시대, 현대는 굳이 메르세데스 AMG, 포르쉐와 경쟁하는 차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전기차의 영역에서 내연기관 시대의 격 차이는 큰 의미가 없다. 이미 초고성능 전기 스포츠카 스타트업 리막에 적극적으로 투자했고 그 기술이 EV6 GT의 라이드 앤 핸들링에 적극적으로 적용됐다.
2022년 5월 문을 연 태안의 드라이빙 익스피리언스 센터는 한국타이어와 함께 운영하고 있는데, 한국타이어는 포뮬러-E의 공식 타이어 후원사다. 2010년대 중반 출고 타이어 문제로 약간의 껄끄러움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두 기업은 어차피 시너지 효과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관계다.
비용 문제는 중요하다. 그리고 모터스포츠는 비싸며 그나마 WRC의 운영비가 싼 것도 사실이다. 정확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WRC 팀의 연간 팀 운영 예산은 약 200만 달러(한화 약 25억 원)이다. 포뮬러 원의 경우 연간 1억 4,000만 달러(한화 약 1,730억 원)의 돈이 든다. WEC(세계 내구레이스 챔피언십)의 경우 거의 연간 3,000억 원에 가까운 예산이 든다. 그래서 각 브랜드들은 부호들이자 엄청난 참가비를 부담해주는 고객인 젠틀맨 드라이버를 운용한다.
그에 비해 포뮬러-E의 운영 비용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이다. 더 레이스(the-race.com)에 따르면 2025년부터 포뮬러 E의 팀 운영 예산은 약 1,300만 파운드(한화 약 198억 원) 정도다. 포뮬러 원의 1/10, WRC 기준으로는 10배 정도다. 통상 차량 1대의 개발 비용이 700억 원 정도라고 보면 현대라는 기업의 입장에서 결코 어려운 금액은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전기차 시장은 막 태동하고 있다. 나중에는 불필요한 출력 전쟁이 진정되겠지만 어찌 됐든 지금은 내연기관 시대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고성능 파워트레인 차량을 가질 수 있다는 환상을 자극하는 것이 먹히는 시점이다. 홍보 전략 이전에, 차량 개발 전략 면에서도 포뮬러-E 진입은 고려해볼 만한 과제다.
물론 현대자동차그룹이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리 없고 그들의 고민이 일개 매체 에디터의 시각보다는 훨씬 깊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현대자동차그룹의 포뮬러-E에 동참을 바라는 목소리가 비단 몇몇 모터스포츠 마니아들의 웹상공론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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