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포니 쿠페 콘셉트카 복원과 노스탤지어의 위험
나는 1980년대 초반에 태어났다. 집에 자동차라는 물건이 처음 들어온 것은 1985년이었다. 결국 포니 엑셀이라고도 불렸는데 당시에는 엑셀이라고만 알았다. 나중에 안 것이긴 해도 현대 엑셀이 정식 명칭이었다. 으레 남자아이들은 차를 좋아하기 때문에 대부분 어린 시절에 탔던 차를 기억하곤 한다. 특별한 기억력은 아니란 얘기.
당시만 해도 가정환경 조사란 걸 하면서 ‘컬러 TV 있는 집, 전화기 있는 집’ 이런 걸 써냈다. 대도시이긴 했지만 지방이라 1985년만 해도 자가용이 있는 집은 초등학교 한 반에 1/3 정도가 될까 말까 한 수준이었다. 일 년 후 중동에서 돌아온 작은아버지도 그 차를 샀다.
포니 엑셀, 국산차 최초의 전륜 구동차. 요즘이야 하도 후륜 구동에 대한 예찬론이 많아서 전륜 구동을 차답게 만드는 엔지니어링이 더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현대차가 전륜 구동 차량 개발에 나섰던 건 4인 가족용 차량으로서의 공간 활용성을 위해서였다. 그 차를 타고 꽤 즐거운 여행을 했다. 수동변속기에 내비게이션도 없이 정체의 지옥도를 뚫고 명절과 휴가철을 버텨낸 그 시대 아버지들을 위해 건배.
대학에 와 각지에서 온 친구들과 이야기해보니, 어정쩡하게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던 지역의 아이들에게는 오히려 농촌 지역보다도 즐길 놀잇거리가 부족했다는 걸 알게 됐다. 에버랜드의 전신인 용인 자연농원이 생긴 것도 거의 1980년대 중후반이 돼서의 일이었고, 지역 기반 유원지나 동물원 등은 특별한 날에나 가는 곳이었다. 그런 와중에 아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방문형 놀이기구가 있었으니 바로 ‘리어카 목마’ 혹은 ‘스프링 목마’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리어카야 지금 쓰이는 그 손수레와 별반 구조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철근으로 된 프레임을 좀 더 길게 늘이고, 그 사이에 플라스틱이나 목재로 된 장난감 말의 앞뒤를 리어커 철근 프레임 양쪽에 용수철로 연결한 것이었다. 그 위에 아이들이 올라가서 5분이나 10분 정도 통통 뛰듯 말타기 놀이를 할 수 있었다.리어카 위쪽으로는 기둥을 세워 햇볕을 가릴 수 있는 지붕도 만들었는데, 그 기둥엔 트랜지스터 오디오, 좀 더 형편이 나은 업자는 카세트를 구해 동요나 만화주제가를 틀었다.
며칠에 한 번 골목마다 그 지직거리는 만화주제가가 울리면 아이들은 안달이었다. 그러면 집에 있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이 흥을 주체 못하는 아이들을 앞세우고 나왔다. 구체저인 요금을 기억하진 못하는데, 대략 300원으로 5분 정도를 뛸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도 할아버지 손에 끌려 타러 간 적이 있었는데, 요즘 말로 ‘아싸’, ‘I’ 기질이 강했던 나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유로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 대신 골목대장 차기 보위를 노리던 동생은 신나게 탔던 것으로 기억한다.
현대 포니는 리어카 목마가 인기를 누리던 1980년대 초중반에도 이미 한물 간 차였다. 1974년에 처음 나온 차이기도 했고 점점 스텔라, 로얄 살롱 등의 차량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작은 차, 돈 없으면 타는 차 정도로 인식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는 지역마다 약간 다를 수도 있으니 참고.
나의 아버지도 포니의 후속 모델인 액셀부터 샀으니 나 역시도 포니를 직접 타 볼 기회는 택시 뿐이었다. 기억나는 당시 택시는 포니와 브리사, 대우 맵시 정도였다.
지금이야 수동변속기 차를 타라고 하면 당장 정체구간을 어찌 버티나 하는 생각부터 나지만, 당시에는 수동변속기를 조작하는 게 멋져 보였다. 특히 뒷좌석에서 보는 택시 기사 아저씨들의 손놀림은 신기였다. 출발하자마자 기어를 타닥 하고 움직이는 절도 있는 손동작이 돋보였는데, 한수 위의 분들은 손바닥을 기어봉 위에 놓고 쓰다듬는 듯 부드럽게, 절제된 움직임만으로 변속기를 조작했다.
사실 알고 보면 변속기 내구성에는 ‘쥐약’인 행동이었다. 충분히 엔진 회전수가 확보되기 전에 2단으로 재빨리 변속해 기름 소비량을 줄이겠다는 의도였던 것. 같은 포니라도 택시 기사님들이 모는 모습은 달라 보였다.
참고로 아버지의 엑셀은 곧 흰색 세단형의 프레스토로 바뀌었다. 짐칸이 따로 분리된 세단형이 오히려 실용적이라는 판단이었던 듯하다. 이 차는 1987년 겨울, 큰 사고로 전손 처리됐다. 뒤에서 들이받은 것도 택시였다. 다행히 아버지는 수술을 받고 회복했는데 그 때의 철심은 아직 팔에 남아 있다. 그리고 그 다음의 차는 진남색의 프레스토였다.
감성 소구에 있어서 노스탤지어(nostalgia) 즉 향수는 가장 확실한 전략이다. 2차 대전 전후와 독일 정치인들을 다룬 언론인이자 작가 귀도 크노프는, 노스탤지어(nostalgia)가 잘 자라는 토양은 대상에 대한 무지라고 밝힌 바 있다. 이는 후에 소설가 밀란 쿤데라도 자신의 작품에서 전한다.
무지는 지식이 없다는 것 의미하기보다 떠나온 것 혹은 보지 못했지만 선대가 경험한 것 등 현재의 자기가 알지 못하는 그 상태, 정보의 공백을 말한다. 시간은 정보에 점점 공백을 만들어나가는데 그 자리를 메우는 건 신화다. 신화적 요소들은 감성을 자극하기에 좋다.
현대차의 포니도 어찌 보면 그런 존재다. 지금이야 항수로 대하고 그리워하며, 이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는 나름대로 신선함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만든 공백의 정보 속에는 분명 아쉽고 불쾌했던 경험도 적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세대들이 겪는 쏘나타나 팰리세이드의 품질 불량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듯.
현대차는 1974년 포니 쿠페라는 콘셉트카를 야심차게 내놓았다. 선진국 시장에 내놓을 목적이었던 이 차는 하필이면 1979년 2차 석유 파동으로 인해 그 꿈을 접어야 했다. 게다가 홍수로 도면도 유실돼 버렸다는 것이 현대차의 메시지다.
이러한 포니 쿠페를 복원하기로 결정한 현대는, 포니를 디자인했던 조르제토 주지아로, 그의 아들인 파르지오 주지아로와 다시 손잡고 콘셉트카를 공개했다. 5월 18일, 이탈리에서 열린 ‘현대 리유니온’도 포니 쿠페가 처음으로 선보였던 1974년 토리노 모터쇼를 기념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측면에서 볼 때 쐐기 모양의 전측면 디자인, 직선 중심인 포니의 디자인을 현대적으로 다듬은 이 차는 현대차 임직원, 그리고 그 당시 차를 처음 샀던 이들 모두에게 감동적인 존재일 것이다. B 필러의 ‘PONY COUPE’ 레터링과 역동적인 조랑말 아이콘은 나름대로 현시대적인 재치다.
하지만 기업이 레트로 아이템을 꺼내드는 이유는 결국 미래에 대한 고민을 풀기 위해서다. 포니 쿠페 콘셉트 복원 모델은 멋있지만 ‘레트로’에 그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잘 봐도 드로리언이다. 물론 포니를 테마로 한 현대 45 콘셉트가 아이오닉 5라는 히트 모델로 연결된 것, 고성능 전동화 시대를 지향하는 N 비전 74처럼 미래지향의 성공작도 있으니 한 대쯤은 기념비적인 레트로 모델을 복원한다면 그도 의미 있는 작업이다.
하지만 감성 소구는 언제나 소비자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대해야 한다. 전동화 전환 이후 글로벌 입지가 비약적으로 높아진 현대차는 그만큼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기도 하다. 200년 가까운 역사의 내연기관 공룡들을 불과 60년 정도의 시간에 거세게 추격할 수 있었다면, 전동화 시대 현대의 위상이 추격당하는 일은 더욱 빠를 수도 있다.
기업의 의미 있는 과거를 되살려 그 의의를 되새기는 건 멋진 일이다. 이는 공식적인 국가 기관이 하지 못하는 기록의 작업이다. 엑셀과 리어카 목마를 떠올리던 아련함을 조금은 걷어내고 냉정하게 포니 쿠페 콘셉트카 복원 모델을 봐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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