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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한명륜 기자

전륜 구동의 증조부, 시트로엥 트락숑 아방 탄생 90주년

자동차 역사를 바꾼 자동차에 부쳐

 

자동차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물어보면 십중팔구 후륜 구동 차량을 선호한다고 할 것이다. 아무래도 스포티한 드라이빙 성향을 비롯해 거의 대부분 브랜드에서 고급 차량의 레이아웃으로 인식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자동차 산업이 오늘날의 규모로 확장될 수 있었던 건 바로 전륜 구동의 탄생 덕분이었다. 2024년은 최초의 양산형 전륜 구동 자동차, 시트로엥 트락숑 아방이 탄생한 지 90주년 되는 해다.


Citroen Traction Avant's 90th anniversary
탄생 90주년을 맞이하는 시트로엥 트락숑 아방


90주년 맞이한 시트로엥 ‘트락숑 아방’

본명이 아니었다고?

 

1930년대의 초입, 세계 경제는 미국발 대공황의 여파로 크게 위축됐다. 시트로엥의 창업주 앙드레 시트로엥은 당시 고급 자동차였던 8, 10, 15 모델을 대체하는 차종의 개발에 나섰다. 새로 만들 차는 불경기 속에서 적어도 2년의 업계 우위를 지켜 줄 모델이어야 했다.

 

Traction Avant's 90th anniversary
트락숑 아방

앙드레 시트로엥이 새로운 자동차를 설계하면서 중점을 둔 것은 엔진과 변속기 결합을 보다 간단히 하면서 유닛의 크기를 줄이는 한편, 무게 중심을 낮주고 전후 무게 배분을 개선하는 한편 승차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전륜 구동은 최적의 솔루션이었다. 사실 전륜 구동 레이아웃의 개념 자체는 이미 존재했다. 심지어 엔진에서 차축으로 전달되는 동력 손실을 최소화하는 등속 조인트 기술도 개발돼 있었다. 다만 이것을 양산에 맞게 최적화한 것이 시트로엥이었다.

 

이렇게 새로이 제작된 자동차는 1934년 4월 18일에 첫 선을 보인다. 그러니까 지난 4월 18일이 트락숑 아방의 90세 ‘생신’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 차의 이름은 트락숑 아방이 아니라 ‘7’이었다. 이는 프랑스 자동차 세법에서 의미하는 행정 마력(fiscal power)를 의미한다. 숫자가 높을수록 세금이 비싼 고급 자동차인 셈. 그러니까 시트로엥은 8, 9. 15와 같은 고가 차종 대신 과세 기준이 낮은 실용적인 차량을 개발했던 것이다. 실제 1.3리터(1,303cc) 엔진을 장착했던 ‘7’의 최고 출력은 32ps 정도로 알려져 있다. 보어(실린더 내경)72㎜, 스트로크(피스톤 행정 거리)80㎜로, 토크가 강한 롱 스트로크 엔진이었다.

 

 

별명 부자, 기술 부자

트락숑 아방

 

트락숑 아방은 말 그래도 전륜 구동이라는 의미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변속기 구조를 보고 붙인 ‘7’의 별명인데, 이는 곧 본명을 대체할만큼 유명했다.


Traction Aavant 1938
컨버터블 버전의 트락숑 아방(1938)

트락숑 아방은 ‘100개의 특허를 가진 차’라는 명예로운 별명도 갖게 됐다. 실린더 슬리브를 분리할 수 있는 오버헤드 밸브 엔진, 4륜 독립식 토션 바 서스펜션과 유압 제어 브레이크도 이 차에 들어간 특허 기술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은 1936년에 등장한 랙 앤 피니언이라는 조향 장치 결합 방식이다. 차축의 랙기어와 스티어링 컬럼에서 이어진 피니언 기어의 결합을 통해, 조향을 직관적이면서도 효율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당시로선 획기적 기술이었다.

 

Traction Avant at Citroen 100th anniversary showrun
2019년 시트로엥 설립 100주년 행사 주행 중인 트락숑 아방


또한 세단은 물론 쿠페와 로드스터 모델까지 갖추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현재 프리미엄 브랜드의 고급 기종 라인업 구성과도 비슷하다.

 

 

사라져버린 전설의 고성능 버전

경매시장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트락숑 아방은  배리에이션이 다양했다. 트락숑 아방 자체가 이름이 되면서, 그 안에서 과세 출력 별 모델이 다양하게 출시됐고, 알파벳으로 오늘날의 부분변경과 같은 차종이 나오기도 했다. 1934년 트락숑 아방 7 모델에 바로 이어서 나온 11은 전장이 20cm나 긴 고급형 모델로, 수명도 길었다. 1957년 자벨 공장(현재 파리 15구의 시트로엥 공원)에서 마지막으로 생산될 때까지 75만 대나 팔린 트락숑 아방의 핵심 라인업이기도 했고, 특히 1955년의 11D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유럽 고급차 시장을 풍미한 DS 시리즈의 시초가 되기도 했다.


11D, 1955
1955년형 트락숑 아방 11

Traction Avant 15 SIX D(1954)
이후 고급 모델 DS 시리즈의 원형이 되는 15 SIX D(1954)

그런가 하면 역시 1934년에 나온 22 모델은 트락숑 아방 중 가장 미스터리한 모델이기도 하다. 3.8리터엔진을 장착해 당시로서는 놀라운 최고 출력 100ps, 최고 속력은 140km/h에 달했다. 유선형의 헤드램프와 숫자 8이 각인된 그릴 등 차별화된 외관의 이 차는 20대만 제작된 특별 모델이었다. 그런데 이 차는 도대체 찾아볼 수 없다. 이보다 적은 대수로 제작된 차라고 해도 남아 있는 경우가 없는 게 아니다. 어느 부호들의 창고에 들어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 종적이 묘연하다. 경매 시장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그야말로 미스터리한 모델이다.

 

 

생텍쥐페리와 간접적인 인연

레옹 베르트의 탈출기 <33일>

 

트락숑 아방의 인기는 대단했고 덕분에 다양한 문화 컨텐츠에 등장했다. 영화에는 요즘으로 치면 PPL(간접광고) 차량만큼 등장했다. 알랭 들롱의 꽃다운 시절을 볼 수 있는 영화 <갱(Le Gangs)>(1977)을 비롯해 수많은 작품에서 출중한 주행 성능을 자랑한다.


하지만 이 차는 의외의 곳에서도 등장한다. 바로 <어린 왕자>의 작가 앙트완 드 생텍쥐페리와의 간접적인 인연이다. <어린 왕자>를 읽어 본 이들은‘이 책을 어른에게 바치는 것에 대해 어린이들에게 용서를 구한다’고 하는 서문에 언급된 레옹 베르트(Leon Werth)라는 인물이다. 유태계 프랑스 작가로 생텍쥐페리의 절친이었던 그는, 2차 세계대전 중 파리를 탈출하던 33일간의 기록을 담은 소설 <33일>을 유작으로 남겼는데, 이 때 레옹 베르트가 파리 탈출에 이용했던 차가 트락숑 아방이었다. 지붕에 피난 살림을 잔뜩 올린 그의 트락숑 아방은 <33일>의 표지에도 등장한다. 참고로 이 소설의 추천사도 생텍쥐페리가 썼다.

 

Traction Avant
레옹 베르트의 <33일>, 표지의 트락숑 아방

한국에서 시트로엥의 인지도는 제로에 가깝다. 바로 옆 나라 일본만 해도 2023년 기준으로 5,000대가 넘게 팔리는 것과는 극명히 대조된다. 가장 최근에는 SUV 바람을 타고 2019년 당시 C3, C5 에어크로스를 런칭했으나 디젤 라인업의 판매 급감, 마케팅 전략이 부재로 시장에서 기지개조차 켜지 못했다. 그리고 한불모터스에서 스텔란티스 코리아로 구 PSA 차량의 판매권이 이관되는 중 자연스럽게 대열에서 이탈했다. 고급 브랜드인 DS 역시 힘을 거의 못 쓰고 국내에선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다. 


Citroen C5 Aircross
2019년 국내 출시됐던 시트로엥 C5 에어크로스

그럼에도 전륜 구동 차량을 타고 있다면 그 자체로 트락숑 아방의 음덕(陰德)을 입고 있다. 1970년대 말 시트로엥이 경영난을 겪으며 대부분의 특허가 다른 제조사에 팔린 덕분에 다른 브랜드의 소비자들도 그 혜택을 간접적으로 경험해 왔다. 대표적인 것이 액티브 서스펜션으로 이 역시 시트로엥이 처음 선보인 하이드로액티브 시스템에 근간을 두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시트로엥은 다양한 기술을 개발해 오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매력적인 전동화 모델들을 내놓으며 유럽을 포함한 글로벌 시장에서는 새로운 장을 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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