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에 예술을 입힌 천재와 디자인을 산업화한 기업인
2024년 3월 13일, 마르첼로 간디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약 한 달이 못 된 4월 9일, 피닌파리나의 CEO 파올로 ‘피닌’파리나도 타계했다. 파올로 피닌파리나는 아직 한창 활동할 시기인 65세였다. 마르첼로 간디니가, 파올로 피닌파리나의 부친이자 거장인 세르지오 피닌파리나가 세상을 떠났을 대와 같은 나이인 85세로 비교적 천수를 누렸다는 점에 비하면 요절이다.
모두 토리노가 낳은 자동차 디자인의 거물들이다. 생일도 이틀 차이였는데 세상을 떠나는 날짜마저 비슷했다. 하지만 20년의 나이 차이가 있는 만큼 업적의 양과 질은 비교할 수 없다. 무엇보다 두 사람이 활동한 시기에 따라 디자인이 자동차 산업에서 갖는 존재감 및 의미가 달랐다. 즉 두 디자이너의 업적과 삶은 자동차 산업에서 디자인의 흐름을 20년 단위로 볼 수 있는 기준점이기도 하다.
마르첼로 간디니와 파올로 피닌파리나의 부고
1938. 8. 26~2024. 3. 13
“스포츠카는 경쟁을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마르첼로 간디니, 예술가
페라리 디자인의 수장 플라비오 만조니는 역대 가장 위대한 자동차 디자이너로 마르첼로 간디니를 꼽았다. 만조니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디자이너들도 동의할 것이다. 특히 럭셔리카 업계에서는 마르첼로 간디니가 보여 준 예술 주도의 기술적 완성을 경이로운 업적으로 추앙하고 있다.
실제로 마르첼로 간디니는 예술적 분위기가 가득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이탈리아 북부 토리노는 이탈리아 자동차 공업의 핵심지이지만 동시에 수많은 미술관과 오페라 하우스를 갖춘 문화 도시이기도 하다. 마르첼로 간디니의 부친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를 지낼 정도로 음악에 조예가 깊었고, 아들을 피아니스트로 키우고 싶어했다. 물론 마르첼로는 부친의 기대와 달리 일찍 자동차 디자인과 엔지니어링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래서인지 그의 디자인에는 음악적인 리듬감, 질서가 있다.
예컨대 모던 스포츠카 디자인의 새 기준을 세운 것으로 평가받는 람보르기니의 미우라(Miura)는 간결하고 직관적인 선의 움직임으로 음악의 리듬감을 구현했다. 그런가 하면 심플하고 직관적인 선의 조합으로 음악에 깃든 수학적 질서를 표현한 차가 람보르기니 쿤타치, BMW의 1세대 5시리즈 마세라티 2세대 콰트로포르테와 같은 디자인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콰트로포르테는 후일 5세대에 이르러 베르토네가 아닌 피닌파리나의 작업으로 다시 태어나기도 했다.
마르첼로 간디니의 디자인을 보면 조금 특이한 디테일이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미우라의 ‘속눈썹(eyelashes)’라고 불리는 요소다. 이는 피아트의 850 스파이더의 헤드램프 디자인을 약간 응용한 것인데 정작 본인은 그 외에 아무런 의도도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피아트 850 스파이더의 디자인을 맡은 인물은 바로 동갑내기이자 베르토네에서의 선임자였던 조르제토 주지아로였다. 주지아로의 입사 시기가 1959년이고 간디니의 입사 시기가 1964년이다. 영향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없는 시기다.
간디니도 주지아로처럼 자신의 디자인 회사를 차려 독립했다. 다만 그 시기가 1979년으로, 주지아로와 달리 베르토네에 머문 시기가 꽤 길었다. 물론 독립 전에도 간디니는 이미 유명 디자이너였고 일감은 충분했다. 하지만 이탈디자인을 크게 성장시키며 기업인으로서의 면모를 확대해 간 주지아로와 달리 간디니는 스스로의 이름을 내건 공방 수장으로서의 정체성을 중요하게 여기며 이어나갔다. 이 또한 가문의 피에 녹아 있는 예술성이 어떻게든 발현된 셈이다.
간디니는 디자이너 치고는 경쟁적이거나 신경질적인 성격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신사적이고 조용하며 그의 강아지와 산책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었다고. 사실 이는 그의 스포츠카 디자인 철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스포츠카를 만들 때 흔히 떠올리는 레이스에서의 승자 이미지를 탈피하고 싶었습니다. 당시로서는 리스크가 있는 방향성이었죠. 누가 이기지 못하는 스포츠카를 사고 싶어할까 하는 우려의 시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포츠카를 보는 나의 관점은 달랐습니다.”
그는 19세기 유럽 지식인+예술가의 면모를 이어 온 인물이었던 셈이다. 확고한 자신의 철학과 경험을 바탕으로 하되, 자신을 필요로 하는 주체의 쓰임에 맞게 유연하게 표현할 줄 알았던 자동차 산업계의 마지막 장인이었다.
1958. 8. 28~2024. 4. 9
“피닌파리나는 미술관 아닌 디자인 기업”
파올로 피닌파리나, 비즈니스맨
태어나 보니 이미 ‘재벌집 막내아들’이었다. 파올로 피닌파리나의 위치가 그랬다. 그가 성장해서 가업에 뛰어들었을 때, 자동차의 디자인은 더 이상 독보적인 영역이라기보다 기업 대 기업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영역으로 바뀌어 있었다.
파올로 피닌파리나는 아버지 세르지오, 할아버지 바티스타만큼 예술가적 면모를 지닌 사람은 아니었고 그 스스로도 이를 인정했다. “디자인은 창조성, 직관성과 긴밀히 연결돼 있는데, 나는 특별히 그런 편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동차 디자이너로서 실격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페라리 디노, F40 등을 디자인했던 레오나르도 피오라반티가 디자인 디렉터로 재직하던 1980년대 초, 그 아래서 디자인 감각을 수련했고 의외의 영역에서 재능을 발견했다. 바로 광고였다. 당시 피닌파리나는 별도의 광고 디자인 회사를 두고 있었는데, 파올로 피닌파리나는 여기에 대표로 취임했다. 그의 나이 29세가 되던 1987년이었다. 그는 여기서 꽤 오랜 시간 동안 성공적 커리어를 쌓았다. 코카콜라, 라바짜 커피뿐만 아니라 FC 유벤투스, 그리고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성화 봉송 등 스포츠 마케팅 등에서도 굵직한 성과를 올렸다.
그러던 그가 가문의 본업인 자동차 디자인 회사 수장이 된 것은 비극적 우연 때문이었다. 2008년, 피닌파리나를 이끌던 한 살 터울 형인 안드레아 피닌파리나는, 그의 베스파 스쿠터를 타고 가다가 바이크의 우선통행권을 무시하고 들어온 한 노령운전자의 차와 충돌해 세상을 떠났다. 큰 충격과 슬픔을 다스릴 틈도 없이 그는 피닌파리나를 이끌어야 했다. 당시 부친인 세르히오 피닌파리나가 살아 있었지만 이미 80대에 가까운 고령이었고 자식을 잃은 충격으로 회사를 이끌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개인에게는 비극이지만 이후 파올로가 이끈 피닌파리나의 운영 형태는, 카로체리아라는 비즈니스를 예술적인 가업에서 초현대적인 솔루션 전문 비즈니스로 어떻게 이행하는지를 보여 준 정석이자 표본이었다. “피닌파리나는 박물관이 아니라 디자인 솔루션 기업입니다.” 파올로 피닌파리나가 한 매체를 통해 밝힌 이 메시지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실제로 피닌파리나는 단순히 디자인뿐만 아니라, 주요 제조사들이 디자인 개발단계에서 필요로 하는 테크니컬한 데이터 수집, 특히 에어로다이내믹 디자인 설계를 위한 풍동(wind tunnel) 시스템 등을 선구적으로 갖추고 있었다.
그가 피닌파리나를 온전히 맡게 된 후 피닌파리나의 대표작은 BMW 그란 루쏘(2013), 그의 부친에게 헌정하는 피닌파리나 세르지오 컨셉트(2013), 그리고 그의 조부를 기리는 피닌파리나 바티스타(2020) 등이 있다.
물론 파올로 피닌파리나 재임 중 한 가지 큰 사건도 있었다. 2015년 인도의 마힌드라와 테크 마힌드라에 3,300만 달러(당시 한화 390억 원)에 인수된 것. 물론 인수 후에도 피닌파리나의 독립적인 지위는 유지되고 파올로 피닌파리나의 이사회 의장 직위도 일단 겉으로는 큰 잡음 없이 유지됐다.
하지만 이는 더 이상 카로체리아라는 비즈니스가 독립적인 사업체로서 수익성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은 상태가 됐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피닌파리나가 독보적으로 제시했던 디자인의 영역은 이제 기존 제조사들의 디자인 부서도 갖추고 있는 능력이 됐다. 굳이 돈을 써 가며 외주화할 이유가 없어진 것. 차라리 자금력은 ‘빵빵’하지만 기술력이 부족한 기업의 일원이 되는 편이 나은 선택일 수 있었다. 어차피 피닌파리나의 손길을 원하는 브랜드들이 줄어드는 상황에 마힌드라의 품에 안기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현재 피닌파리나의 디자인 아이디어가 IT 강자인 마힌드라와 만나 내놓는 미래모빌리티 솔루션은, 새로운 모빌리티 인프라 구축을 꾀하는 주요 신흥국가를 대상으로 팔기 좋은 빅 아이템이다. 피닌파리나의 공식 SNS를 보면 다양한 도심형 전기 모빌리티 프로덕트의 디자인을 볼 수 있다. 자동차 업계에서는 향후 가장 큰 비즈니스 먹거리로 도시 모빌리티 솔루션, 즉 교통 수단은 물론 교통 결절점 주변의 시설 및 디자인 인프라의 설계를 염두에 두고 있다. 피닌파리나의 이름값은 해당 솔루션에서 꽤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마힌드라 측에서는 사람들이 더 이상 피닌파리나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시기에 슬그머니 마힌드라의 일개 사업부로 축소시키면 되는 문제다.
자동차 디자인
인간 거장의 시대는 끝났나?
현재의 자동차 디자인은 더 이상 전설적인 디자이너를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개발 단계에 선행, 병행하는 시장 연구와 첨단 측정 기술 기반의 데이터는, 디자인에 있어 인간의 영역을 좁혀가고 있다.
그럼에도 위대한 디자이너들의 존재가 부각되는 것은, 후대 슈퍼 컴퓨팅으로 만들어내는 디자인이 지향하는 결과물이 결국 그 거장들의 손에서 나오는 결과물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디자인의 방향성의 전제를 만들 때, 이 단계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인간 디자이너의 직관과 손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변하는 것은 이 디자이너의 역량과 자동차 및 제품 제조사와의 비즈니스적 관계 및 형태다. 그리고 이 변화를 주관하는 것은 시대의 전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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