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앞둔 스팅어, 기억할 업적과 현실적 관점의 생명 연장
최초의 후륜구동 GT, 최초의 국산 고성능 패스트백 세단, 그런 뻔한 이야기 말고도.
기아 스팅어가 기억되어야 하고,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더 있으며, 그 이유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유난한 독일차 사랑이 실질적인 수요로 이어지며 국산차의 시장 점유율이 후퇴할 때, 스팅어는 반격의 시작이었다.
현기차를 보는 시선을 바꾸다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겠다. 2017년을 제외하고 스팅어는 월 판매량 1,000대는 고사하고 400대를 넘기기도 버거웠다. 수출로도 재미를 못 봤다. 잘 팔리지 않기야 마찬가지였지만 스팅어보다 후에 개발된 제네시스 G70에도 한참 못 미쳤다.
하지만 스팅어는 판매량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차가 아니다. 무엇보다 현대와 기아에 대한 이미지를 바꿨다. 스팅어의 이전의 현대와 기아는 북미와 유럽 어느 쪽에서도 일본차의 만족스런 하위 호환 이상이 아니었다. 그런 이미지를, 2010년대 초반부터 메르세데스 벤츠와 BMW를 수없이 뜯었다 조립해본 연구원들이 바꿨다. 스팅어의 라이드 앤 핸들링에서 책임연구원급 엔지니어이자 레이서이기도 한 최장한 연구원은 스팅어를 향한 그 많은 찬사가 갑작스럽지 않았다고 했다. 내연기관 고성능차 영역에서 메르세데스와 BMW를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의 자신감이란 엄청난 것이다. 그걸 가질 수 있을 정도의 노력은 한국 차의 DNA 변화에 영향을 줬다.
협력업체 관계자들도 많은 것을 바꿨다. 연구원들이 원했던 시제품이 전륜 구동 차량 중심의 국내에 흔했겠는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을 실제로 만들어내야 했던 협력업체도 마땅히 평가받아야 한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역량의 한계가 있었고 그로 인해 이 차의 고질병이라 할 만한 부분도 있었다. 그것 역시 받아들여야 할 성적표의 일부지만, 공에 비해 감안할 수 있는 과오다.
후륜구동 세단이라면 독일차만이 답이라 생각하는 수입차 고객, 같은 값이면 그랜저를 사겠다는 보수적 고객, 의심의 눈초리가 가득했던 전문가들을 설득하기 위한 마케팅, PR의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연구원들이 차를 만들었다면 마케팅과 PR은 그런 차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소비자들의 시선을 바꾸려 했다. 결과가 성공적이라 할 순 없었지만.
2020년대 들어와 현대차 그룹의 약진을 이끌고 있는 것이 아이오닉 브랜드라면, 그 이전 2, 3년 전부터 힘을 낸 게 제네시스다. 그 제네시스의 리브랜딩을 이끈 모델이 G70인데, 이 차는 스팅어가 없었으면 탄생할 수 없었다. 스팅어의 라이드 앤 핸들링을 만들어낸 연구원들이 G70의 개발팀으로 넘어간 덕분이라는 것은 이제 다 알려진 사실이다.
단종, 판매 부진만이 아닌 정해진 시간의 운명
현대차그룹 정의선 회장은 “내연기관 시대에는 패스트팔로워의 입장이었지만 전동화 시대에는 퍼스트 무버로서 산업계를 선도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런 플랜의 밑그림은 2010년대 초중반에 이미 그려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스팅어는 어차피 2세대로 거듭나지 못할 운명이었다고 보는 게 맞다. 스팅어의 생명력을 연장하려면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로로 배치된 자동변속기에 모터를 통합시키는 방식의 하이브리드 시스템은 기아가 개발하기에는 리스크가 큰 것이었다. 어차피 기아의 하이브리드는 크랭크축에 바로 연결되는 전륜 구동 기반의 모터 시스템이었고 그걸 개발해 안정화시키는 데도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
결국 그룹 전략 차원에서 과도적 단계라 후륜 구동 하이브리드를 굳이 거치느니 차라리 고성능 전기차개발에 올인하는 게 ‘퍼스트 무버’로서의 방향성에 부합했다. 전기차 EV6 및 EV6 기반 585ps 고성능 모델 EV6 GT가 그런 이상을 대변한다. 그룹 차원에서는 현대의 아이오닉 6, 제네시스 X 콘셉트 등이 채 못다한 스팅어의 꿈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성형 잘 받는 예쁜 본판
어쨌든 스팅어는 길거리에 심심치 않게 보이고 그 시간도 길 것이다. 일단 차대 자체의 내구도가 검증됐기 때문에 최소 10년을 본다면, 2022년 생산분은 2030년 언저리까지 현역으로 뛰어도 큰 무리는 없을 차다.
이러한 강점에, 스팅어의 약점, 퍼포먼스 세단을 지향하면서도 뭔가 패밀리 세단을 원하는 고객의 눈치 사이에서 갈팡질팡한 인테리어의 조합되며, 오히려 튜닝 베이스카로서의 우수한 자질을 갖게 됐다. 출시된 지 50년 가까운 닛산 페어레이디, 튜닝과 리스토어로 여전히 도로에서 현역으로 뛰는 것은, 동력 성능과 핸들링의 재미가 뛰어남에도 튜닝이 가미될 여백이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내 최대의 튜닝 및 애프터마켓 전시인 오토살롱위크(구 서울오토살롱 & 오토위크)에 꾸준히 등장했던 스팅어 기반 튜닝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동호회, 개인 단위의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스팅어를 검색하면 준중형 전륜구동을 기반으로 억지로 멋을 낸 차량과는 다른 진짜 퍼포먼스 튜닝카, 럭셔리 드레스업카의 면모가 돋보인다. 흔히 ‘본판이 예뻐야 성형발도 잘 받는다’는 이야기가 통하는 차란 것. ‘단종’이라는 단어가 주는 정서적 후광 효과까지 받는다면, 튜닝 베이스카로서 스팅어의 가치는 더 상향될 것이다.
슈퍼레이스 GT1, 늙은 '젠쿱'의 대안
여기에 한 가지 더. 모터스포츠에서의 활약 가능성이다. 개인적으로 희망이자 건의 사항에 가깝다. 하지만 여기에는 많은 모터스포츠 팬과 팀들이 공유하는 한 가지 문제의식이 실마리가 될 수 있다. 현재 국내 최대 규모 모터스포츠 이벤트인 CJ 슈퍼레이스에서 GT 1클래스를 구성하는 베이스카는 2.0리터 터보와 3.8리터 자연흡기의 제네시스 쿠페다. 2015년을 마지막으로 단종된 제네시스 쿠페의 노후화는 현장에서 부담이 되는 트러블을 일으키고 관객들의 흥미를 반감시키는 요소가 된다.
이 시리즈를 좀 더 개편해, 2.5리터급 스팅어를 제네시스와 함께 투입하는 것은 과욕일까? 스팅어가 단종되긴 했지만 G70는 후속 모델의 등장이 점쳐지고 있으므로 부품을 구하기도 어렵지 않고, 규격에 맞다면 얼마든지 대체 부품을 찾을 수 있는 차종이다. 무엇보다 디자인이 매력적이라는 것만으로도 모터스포츠 흥행에는 긍정적인 요인이 될 수 있다.
최근 EV6가 스팅어의 가치를 전동화 시대로 계승했다는 메시지의 광고 ‘The Kia Stinger X EV6 GT | A Tribute to Stinger’가 화제다. 참고로 스팅어의 드리프트 주행을 맡은 드라이버는 EV6 GT가 쟁쟁한 고성능차와 벌인 드래그 레이스에서 주인공 차량을 운전했던 레이서인 소준호 씨다. 이 광고에 들어간 프랭크 시나트라 풍의 재즈 음악은 브라이스 다볼리, 장 마리 마리에의 ‘Dream Come True.’ 2017년 스팅어가 첫 등장했을 때의 음악은 에디트 피아프의 ‘Non Je Ne Regrette rien(후회하지 않아)’였다. 후회하지 않는다면 꿈은 이뤄진 거라는 뜻일까, 꿈이 이뤄졌기에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스팅어의 시작처럼 마지막에도 참 내연기관 시대의 로망이 묻어난다. 영락없이 20세기 소년의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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